조선

2023 국가직 9급(4/8) 문11.

몰못아새벽 2024. 10. 10. 19:07

문 11.(가) 인물이 추진한 정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선비들 수만 명이 대궐 앞에 모여 만동묘와 서원을 다시 설립할 것을 청하니, (가) 이/가 크게 노하여 한성 부의 조례(皂隷)와 병졸로 하여금 한강 밖으로 몰아내 게 하고 드디어 천여 곳의 서원을 철폐하고 그 토지를 몰수하여 관에 속하게 하였다.

-대한계년사

 

①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② 「대전회통』을 편찬하였다.

③ 비변사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④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문제는 조선 후기의 역사적 인물과 그가 추진한 정책에 대한 이해를 요구합니다. 문제에서 제시된 자료는 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을 가리키며, 이에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흥선대원군 (19세기 후반 조선의 정치가)

흥선대원군(1820~1898)은 철종의 사후 고종을 즉위시키고 섭정을 하면서 조선 후기의 쇠퇴한 국가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조선 왕실과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했으며, 그의 주요 정책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서원 철폐
    •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사학과 선비들이 운영하던 교육기관이었지만, 후기에 가서는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원의 70% 이상을 철폐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로 귀속시켰습니다.
  2. 사창제 실시
    • 사창제는 지방에서 곡식을 모아두고 흉년이 들거나 백성이 굶주릴 때 이를 대여해주는 제도입니다. 흥선대원군은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사창제를 부활시켰습니다.
  3. 비변사 폐지
    • 비변사는 임진왜란 이후로 조선의 군사 및 외교 정책을 담당하는 기구로서 기능을 강화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권력이 집중되면서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하고, 그 대신 의정부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강화했습니다.
  4. 통상 수교 거부 정책
    • 흥선대원군은 서양 세력의 침입에 맞서 나라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척화비'를 세우고 통상 수교를 거부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이를 통해 조선을 외세로부터 지키려 했습니다.
  5. 대전회통 편찬
    • 조선의 법과 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법전인 '대전회통'을 편찬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에 법적, 행정적 근거를 마련한 중요한 법전입니다.

보기 해설

  •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사창제를 부활시켜 지방 행정과 백성의 경제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 「대전회통」을 편찬하였다: 대전회통은 흥선대원군이 법과 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편찬한 법전입니다.
  • 비변사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하고, 의정부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 정치 체제를 강화하려 했습니다.
  •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추진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서양의 침입을 막기 위해 통상 수교를 거부하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③ 비변사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입니다.


 

<대한계년사>

 

조선말기 문신 정교가 편년체로 저술한 역사서.

수필본. 1864년(고종 1)부터 1910년 국권상실 때까지 47년간에 걸친 고종 이후의 한말시대사로서 9권으로 되어 있으며, 양면 모두 12행씩 기록되어 있다.

내용
이 책은 저자가 직접 경험한 것을 서술한 것으로 한국 최근세사의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으며, 특히 독립협회의 활동상황을 상세히 기술하였으므로 독립협회 연구문헌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또한, 그가 기록한 ≪민회실기 民會實記≫가 있는데 이 글도 독립협회에 관한 기록으로 이 책의 내용과 비슷하다.

권1은 1864년부터 1893년까지, 권2은 1894년부터 1897년까지, 권3은 1898년 1월부터 그해 11월 4일까지, 권4는 1898년 11월 6일부터 11월 28일까지 기록하였다.

권5는 1899년부터 1900년 4월까지, 권6은 1900년 4월부터 1903년까지, 권7은 1904년부터 1905년까지, 권8은 1906년부터 1907년까지, 권9는 1908년부터 1910년까지를 각각 기록하였다.

정교는 일찍이 독립협회 회원으로서 회원들에게 자주적인 한국사를 가르치기 위하여 ≪대동역사 大東歷史≫를 교열한 바 있고, 또한 ≪대한계년사≫의 기록도 침략세력에 대한 항거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황현(黃玹)의 ≪매천야록 梅泉野錄≫과 함께 주체적인 역사의식의 바탕 위에서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만동묘>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지내기 위해, 1704년(숙종 30) 충북 괴산군 청천면(靑川面) 화양동(華陽洞)에 지은 사당.

인조 때 청나라를 다녀온 민정중이 구해온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글씨 한 폭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해주자 이글을 보고 의종이야 말로 예(禮)를 지켜낸 최고의 군주로 칭송하였다. 존명 사대주의 사상에 열렬했던 송시열은 이를 받고서 이 글을 화양동 석벽(石壁)에 새겨 놓고 석벽 위에 공부하는 사당을 지었는데, 송시열이 죽을 때 그의 제자 권상하(權尙夏)에게 이곳에 묘우(廟宇)를 지어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도록 하여 권상하가 유림을 동원하여 지은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 묘에 딸린 전토(田土)와 노비를 주었고, 영조 때에는 묘를 중수하였으며 면세전(免稅田) 20결(結)을 주었다.

1809년(순조 9)에는 묘우를 개축하고 1844년(헌종 10)에는 정식으로 봄과 가을에 한 번씩 관찰사가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이 묘는 노론(老論)의 소굴이 되어 상소와 비판을 일삼았고, 비용을 염출하기 위해 양민을 토색하는 등 민폐가 심하여,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헐어버리고 신주와 편액(扁額) 등은 서울 대보단(大報壇)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겼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1874년(고종 11) 다시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도 유생들이 모여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므로 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하였다. 조선시대 후기 도산서원 등과 더불어 4대 서원으로 유명하였으나, 노론(老論)세력의 본산으로 화양서원이 행한 병폐가 극심했다. 지금은 복구되어 있고 만동묘정비가 지방기념물 25호로 지정되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의 정치적 목적>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은 단순히 사회적, 경제적 목적을 넘어 중요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붕당 정치의 약화

서원은 조선 후기에 특정 학파와 붕당(당파)들이 결집하여 자신들의 학문적·정치적 세력을 키우는 거점이었습니다. 서원에서는 학문을 연구하고 유생들이 모여서 여론을 형성했기 때문에, 서원은 단순한 교육 기관을 넘어서 정치적 권력의 기반으로 작용했습니다. 특히 노론 등 특정 붕당의 세력이 강력해지면서 국정 운영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서원을 철폐함으로써 붕당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왕 중심의 정치 질서를 강화하려 했습니다.

2. 왕권 강화

조선 후기 왕권이 약화된 이유 중 하나는 서원에서의 정치적 논의와 상소가 국왕의 권위를 저하시킨다는 점이었습니다. 서원은 지방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중앙 권력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서원의 수를 대폭 줄이고 그들의 토지를 몰수함으로써, 중앙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고 왕권을 회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3. 재정 확보

서원이 늘어나면서 서원이 보유한 토지가 크게 증가했습니다. 이는 국가 재정의 악화로 이어졌는데, 서원은 세금을 내지 않는 특권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서원의 토지를 국고로 귀속시킴으로써 국가 재정을 강화하고,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이 또한 왕권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4. 사회 통제

서원은 지방 유력 가문들이 결집해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로 인해 지역 사회에서 서원의 영향력이 상당했습니다. 서원을 철폐함으로써 지방에서 유력 가문들이 가진 정치적·사회적 권력을 약화시키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는 단순한 사회적·경제적 개혁이 아니라, 붕당 정치의 약화, 왕권 강화, 재정 확보, 지방 사회 통제를 목표로 한 중요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조치였습니다.

 


 

<사창제>

 

1. 사창제(社倉制)의 한자 뜻풀이
  • 사(社): 마을 또는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 창(倉): 창고를 뜻하며, 곡식을 저장하는 곳을 의미합니다.
  • 제(制): 제도, 즉 어떤 체계나 규칙을 뜻합니다.

따라서 사창제(社倉制)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창고 제도라는 의미로, 지역 공동체가 자율적으로 곡식을 저장하고, 필요한 때 이를 꺼내 백성들에게 빌려주는 구조입니다.

2. 사창제 이전의 서민 복지와 구휼 제도

사창제는 흥선대원군 때 처음 도입된 제도가 아니며, 조선 초부터 서민 복지와 구휼을 위한 여러 제도가 존재했습니다. 대표적인 제도를 몇 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의창(義倉) 제도

  • 의창은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구휼 제도로, 국가가 주도하여 곡식을 저장하고, 흉년이나 재난 시 백성들에게 대여해주는 시스템이었습니다.
  • 이는 중앙 정부가 관리하는 국가 주도의 구휼 제도였습니다. 사창제와 달리 지역 공동체보다는 국가 차원의 대응이었으며, 이를 통해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했습니다.

환곡(還穀) 제도

  • 환곡은 곡식을 백성에게 빌려주고, 추수 후 이자를 붙여 갚게 하는 제도입니다.
  • 초기에는 백성들에게 필요한 곡식을 지원하는 목적으로 시행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자율이 높아지고 운영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심해지면서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기도 했습니다.
  • 이 환곡 제도의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 사창제를 재도입하게 됩니다.

3. 흥선대원군이 사창제를 실시한 이유

흥선대원군이 사창제를 부활시킨 것은 이전의 환곡 제도가 부정부패와 높은 이자율로 인해 백성들의 불만을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보다 자율적이고 공정한 제도를 원했습니다. 사창제는 국가가 아닌 마을 공동체가 스스로 운영하므로, 부정부패를 방지하고 백성들에게 더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었던 제도였습니다.

4. 흥선대원군이 사창제를 최초로 실시한 것은 아님

흥선대원군이 사창제를 최초로 도입한 것은 아니고, 조선 초기부터 운영되던 제도를 부활시킨 것입니다. 사창제는 조선 성종 때 처음 도입되었으나, 이후 폐지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환곡 제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사창제를 다시 시행한 것이지, 새로운 제도를 처음 만든 것은 아닙니다.

결론

사창제는 마을에서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창고 제도로,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구휼 제도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이 제도를 다시 시행한 이유는 환곡 제도의 부작용을 해결하고자 한 것이며, 조선 성종 때 이미 존재하던 제도를 부활시킨 것이지, 흥선대원군이 처음으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비변사'의 폐지>

 

1. 비변사(備邊司)의 한자 뜻풀이

  • 비(備): 대비하다, 방비하다.
  • 변(邊): 변방, 국경.
  • 사(司): 기관, 관리하는 조직을 뜻합니다.

따라서 비변사(備邊司)는 변방을 대비하는 기관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국경을 방비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설립된 기관입니다.

2. 비변사 폐지와 왕권 강화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하고 결국 폐지했습니다. 이는 왕권을 약화시키고 정치를 혼란스럽게 만든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 비변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입니다.

비변사의 성격 변화

비변사는 원래는 국방을 담당하는 임시 기구로 16세기 중반에 설치되었으나,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 이후 국방뿐만 아니라 외교, 정치, 경제 등의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면서 점차 최고 권력 기구로 변질되었습니다. 이후 비변사는 왕권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하는 상태로 성장해, 왕의 통제력을 약화시키고 조선 후기 정치적 혼란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왕권 강화 정책

흥선대원군은 비변사의 지나친 권력 집중을 해소하고, 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하고, 결국 폐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비변사가 담당했던 군사, 행정 기능은 다시 의정부로 이관되었고, 왕이 국정을 주도하는 의정부 중심의 전통적 통치 체제를 강화했습니다.

3. 비변사 폐지에 대한 저항과 그 해결

비변사는 오랫동안 조선의 최고 의결 기구로 기능해왔기 때문에, 이를 축소하거나 폐지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층의 저항이 예상되었습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정치적 수완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권력 집중과 의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수장이자 고종의 섭정을 맡았던 만큼, 그의 권력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그는 비변사의 기능 축소 및 폐지에 있어 단호한 태도를 보였으며, 그의 정치적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이는 비변사의 폐지 과정에서 주요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억누르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기득권 세력의 약화

조선 후기 사회는 이미 붕당 정치의 쇠퇴로 기득권 세력들이 갈등하고 있었고, 강력한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내부 분열과 기득권 세력의 상대적 약화를 이용해 자신의 개혁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서원 철폐와 같은 조치로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저항 세력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었습니다.

군사력 장악

흥선대원군은 군사력 또한 장악하고 있었으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도 있었습니다. 비변사 폐지에 대한 저항이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은 그들의 움직임을 강력하게 제압하거나 무력으로 대응해 저항을 차단했습니다.

결론

비변사(備邊司)는 "변방을 대비하는 기관"이라는 뜻으로,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하고 폐지했습니다. 비변사의 폐지 과정에서 예상되는 저항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권력, 기득권 세력의 약화, 군사력 장악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왕 중심의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다시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대전회통>

 

1. 대전회통(大典會通)의 한자 뜻풀이

  • 대(大): 크다, 위대하다.
  • 전(典): 법전, 규범.
  • 회(會): 모이다, 통합하다.
  • 통(通): 통하다, 하나로 연결되다.

따라서 대전회통(大典會通)은 큰 법전과 여러 법령을 모아서 통합한 책이라는 뜻으로, 조선 왕조의 법령과 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법전입니다.

2. 이미 존재하던 '경국대전(經國大典)'

  •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조선 성종(15세기) 때 편찬된 법전으로, 조선의 기본적인 법과 제도를 정리한 핵심 법전입니다. 이후 속대전(續大典)**이라는 법전이 영조 때(18세기) 추가로 편찬되었으며, 이것도 역시 조선의 법과 제도를 보완한 책입니다.
  • 경국대전은 오랫동안 조선의 국가 통치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법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법령이 많이 변하고 새로운 법이 추가되면서 기존의 법전이 조선 후기의 상황을 완벽하게 반영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3. 흥선대원군이 '대전회통'을 편찬한 이유

흥선대원군은 대전회통을 편찬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혼란한 법 체계를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체계화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법령 정비와 통합

조선 후기에는 법령이 점점 많아지면서 기존의 법전만으로는 복잡한 사회 상황을 모두 다루기 어려웠습니다. 각종 변칙적 법령, 개별적인 사례들, 그리고 시행령 등이 경국대전 이후 여러 가지 형태로 추가되었으나,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 법령들을 통합적으로 정리하여 조선 후기의 사회 변화를 반영한 새로운 법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 법 집행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혼란을 줄이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왕권 강화

대전회통 편찬의 이면에는 흥선대원군의 왕권 강화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기존의 법령 체계가 붕당 정치나 일부 세력의 권력 남용에 의해 왜곡되고 무력화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새롭게 정리된 법전을 통해 법의 권위를 확립하고, 중앙 권력(즉 왕실)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이는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행정의 효율성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행정적 효율성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대전회통을 통해 법과 행정의 기준을 명확히 하여, 법 집행을 더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는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실용적 목적이었습니다.

사회 혼란 수습

조선 후기는 외부 세력의 침입,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갈등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법적 혼란을 정리하고, 새로운 기준을 확립함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다시 바로잡으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4. 진짜 목적: 왕실과 중앙 권력의 통제력 회복

대전회통 편찬의 진짜 목적은 단순히 법령을 정리하고 통합하는 것 이상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흥선대원군은 조선 후기의 중앙 권력이 약화되고, 지방 세력이나 특정 가문이 지나치게 성장한 상황을 바로잡고 중앙 권력의 통제력을 회복하려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전회통은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고, 기존 법령이 기득권층에 의해 변질되거나 무시되는 것을 막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결론

대전회통은 기존의 법령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법 집행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목적은 왕실과 중앙 권력의 권위를 회복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써 법적 통제를 확립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흥선대원군은 조선 후기의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국가 운영을 보다 강력하게 중앙집권적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서론

19세기 중반, 조선은 서구 열강과의 충돌이 빈번한 시기였다. 이러한 외교적 위기 속에서 흥선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통해 외세의 침입을 차단하고,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고자 했다. 이 정책은 특히 척화비를 세우며 서양과의 어떠한 교류도 거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정책이 단기적으로는 외세로부터 조선을 지킬 수 있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조선의 국제적 고립을 심화시키고 근대화의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본 리포트에서는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그 한계와 부작용을 논하고자 한다.

본론

  1. 단기적 성공과 장기적 실패 흥선대원군은 서양 열강의 침입을 막고자 한강 입구를 폐쇄하고, 군사적 충돌을 통해 프랑스(병인양요, 1866)와 미국(신미양요, 1871)의 압박을 일시적으로 막아냈다. 이러한 단기적 성공은 국가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긍정적일 수 있다.
  2. 그러나 이는 장기적 관점에서 실패로 이어졌다. 흥선대원군은 서양과의 외교를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세계적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고, 조선은 국제사회에서 점점 고립되었다. 서양 열강이 자본주의와 산업화를 중심으로 세계 질서를 재편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의 고립 정책은 근대화를 지연시키고 경제적·군사적 경쟁력을 약화시켰다. 결국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되면서 조선은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 근대화 기회의 상실 서구 열강과의 교류를 거부한 것은 근대화의 기회를 상실하게 만든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 특히 일본은 서구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여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했다. 반면, 흥선대원군의 정책은 조선의 전통적인 농본주의와 중화사상을 유지한 채 서구의 기술 발전에 눈을 감게 만들었다. 이는 조선의 산업화와 군사적 발전을 저해했고, 나아가 외교와 경제적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4. 정치적 불안과 국내 혼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내부적으로도 정치적 혼란을 일으켰다. 흥선대원군의 통상 거부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내부 결속을 다질 수 있는 도구였으나, 장기적으로는 정치적 고립과 혼란을 초래했다. 통상 거부는 외교뿐만 아니라 국내 경제에도 영향을 미쳤고, 조선은 서구와의 교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과 기술적 발전의 기회를 잃었다. 이후 고종의 개화파와 쇄국파의 갈등은 이러한 정치적 불안의 산물이었으며, 이는 내부적인 개혁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5. 국제적 흐름을 읽지 못한 폐쇄적 태도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국제사회의 변화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폐쇄적 외교 전략이었다. 19세기 중반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확산으로 세계 각국이 상호 교류를 강화하던 시기였다. 중국, 일본, 서구 열강 등은 세계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경쟁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이 흐름을 거부하고 고립을 선택하면서 자주성을 강조한 폐쇄성이 오히려 국가의 자주권을 침해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론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당시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으나, 장기적으로는 조선을 국제적 고립 상태로 몰아넣고 근대화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서구 열강과의 충돌을 피하는 대신, 외부의 기술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자강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더라면 조선은 보다 강력한 근대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근대화와 국제 외교에서의 개방과 수용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역사적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 국가직 9급(4/8) 문18.  (8) 2024.10.16
2023 국가직 9급(4/8) 문15.  (7) 2024.10.13
2023 국가직 9급(4/8) 문14.  (4) 2024.10.13
2023 국가직 9급(4/8) 문10.  (9) 2024.10.09
2023 국가직 9급(4/8) 문9.  (21) 2024.10.08